S STORY
포기란 없다!
끝까지 방법을 찾아라
혈액암 환자에게 진심 다하는 미더운 명장, 정준원 교수
⚊
인터뷰 마무리 질문으로 진료 철학을 묻자, 정준원 교수(혈액내과)는 세브란스병원 홈페이지에 밝힌 내용은 정말 고민하면서 적은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의사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멀고 험난한 투병의 길을 걷고 계신 환자들의 오늘보다 더 건강한 내일을 위해 연세암병원 혈액암센터의 모든 의료진은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에서 느꼈던, 진료와 환자에 대한 그의 중심이 그대로 박힌 세 문장이다. 정준원 교수는 ‘의사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 방점을 찍었다.
에디터 이나경 포토그래퍼 최재인
혈액암은 장기에 생기는 암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치료 면에서 어떤 어려운 점이 있나요?
급성골수성백혈병, 골수형성이상증후군 등이 대표적인 골수계 혈액암입니다. 고형 장기에 생기는 고형암은 최대한 빨리 발견해 수술적 치료로 완치율을 높이는 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죠. 수술 시점을 놓쳤다면 항암치료를 하고요. 하지만 혈액암은 처음부터 끝까지 항암제로 치료합니다. 항암치료만 보통 4~6개월, 동종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으면 이식 후 1년 정도 걸립니다. 진단에서 치료 종료까지 꽤 긴 기간이 소요되는 거죠. 그래서 젊은 환자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혈액암 치료에 매진하신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치료제나 치료성과 면에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있나요?
혈액암 치료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성공적인 표적 치료제들이 등장했고요. 현재는 전체적인 면역체계를 조절해서 치료하는 약 제들도 나와 면역치료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봅니다. 최근 2~3년 사이에 대단히 많은 약제가 나왔습니다. 암세포만이 가지고 있는 표적을 공격하는 단순한 표적 치료제가 아니라, 세포 내 여러 대사작용이나 정상적인 세포 기능에 영향을 주는 약제들이 나온 것이죠. 카티세포(환자의 T면역세포를 추출해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하는 CAR-T세포) 치료가 대표적인 세포치료의 예입니다.
혈액암 진단을 받고도 치료에 바로 들어가지 않는 때도 있다면서요?
예전에는 진단과 동시에 치료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질병에 관한 연구가 폭넓게 이루어져서 적절한 시점을 찾아 치료를 시작합니다. 혈액암 진단을 받아도 치료 없이 일정 기간 관찰하다가 치료가 필요한 시점에 도달하면 치료를 시작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환자들은 ‘나는 암이 진단을 받았는데 왜 의사는 치료를 안 하고 경과 관찰만 하는 걸까?’ 궁금해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설명해 드립니다. “지금 치료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치료에 의한 득이 실보다 커지는데, 그때는 바로 치료에 들어갑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무 불안해서 환자가 다른 의사를 찾아갈 것 같은데요?
오히려 여러 전문의로부터 같은 설명을 들을 수 있기에 다른 의사를 만나보는 것이 도리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같은 설명을 듣게 되면 처음 진단받았던 기관에 대한 신뢰가 더 높아지기도 합니다. ‘제일 적절한 치료 시점’이나 ‘제일 적절한 치료제’에 대한 판단은 ‘치료 적응증’이 기준입니다. ‘적응증 (indication)’이란 단어가 어렵습니다만, 환자의 적응증을 잘 평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엔 혈액암, 즉 혈액암 세포 자체의 특징은 여러 유전 정보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차세대염기서열분석법을 통해 평가합니다. 쉽게 말해서 세포의 유전자 정보를 확인해 환자의 암에 들어있는 여러 성격을 파악해 내는 겁니다.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가 양성인지 음성인지, 또 양성이면 어느 정도 가졌는지 등에 따라 치료법의 선택, 위험군 해당 여부 등을 알 수 있기에 혈액암뿐 아니라 유방암, 폐암 등에서도 이 검사 법이 이용됩니다. 여러 질병 중에도 가장 많은 유전 정보를 분석하는 질병은 혈액암 분야입니다.
유전자 정보분석은 치료와 효과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건가요?
당연히 치료 성적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환자에게는 특정 약제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조혈모세포이식 같은 힘든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환자를 골라낼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대부분의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는 가장 좋은 치료 성적을 얻기 위해 조혈모세포이식이 필요하지만, 일부 환자들은 항암치료만으로도 조혈모세포이식과 같은 성적을 낼 수 있다면 이런 경우 조혈모세포이식은 필요한 치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결정을 위해 유전자 정보분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혈액내과의 전통이 유명합니다. 그렇게 배우고 현장에서 일하려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은사이신 민유홍 교수님으로부터 환자에 대한 태도와 “모든 방법을 다 강구 해서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배웠습니다. 저희 혈액내과의 전통입니다. 흔히 수술, 방사선치료, 또는 항암제를 이용해 오랜 기간 열심히 암을 치료해 나가다가 더는 치료를 지속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할 때, 주치의 스스로가 치료를 포기하고 편하게 임종을 준비하는 연명치료로 치료 목표를 수정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혈액암을 치료하는 혈액내과에서 이런 포기는 드뭅니다. 예를 들어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1차 조혈모세포 이식을 했는데 실패했다, 그러면 다시 2차 이식을 시도하고, 만 일 2차가 실패하면 다시 또 3차 이식을 해서라도 끝까지 환자를 완치시키려는 마음이 강합니다. 감염증이나 출혈 등 합병증이 끝까지 조절되지 않아 포기하는 때도 있더라도, 암의 치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혈액내과의 전통입니다.
절대 쉽지 않은 혈액암과 싸움에 들어선 걸 후회하신 적은 없나요?
모친의 권유로 의사가 되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의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열심히 노력해서 곧바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굉장히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혈액내과는 일찌감치 전공으로 정했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무조건 완치시키고자 하는 혈액내과의 전투적인 분위기가 좋았고 감동이었습니다. 무언가 암과 직접 싸우는 느낌을 받았는데, 바로 그 점이 너무 좋았습니다. 굉장히 중한 환자를 제가 담당해서 돌보고 있다는 자긍심도 작용했고요. 물론 환자가 돌아가셔서 심한 우울감에 시달릴 때도 있지만, 이분들이 임종을 잘 맞도록 도와드리는 것 또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다음 삶이 있다고 믿으니까요.
혈액암 치료의 길이 더뎌 보입니다.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조혈모세포이식은 1950년대 말 성공 이후 혈액암 치료에 여전히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 해보면 자신의 몸 안에 타인의 혈액이 살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치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환자의 몸에 문제가 없도록 의료진은 최선을 다하고 많은 환자가 잘 지내고 계시지만, 한몸에 두 사람의 세포가 공존한다는 상황 자체가 정상은 아닌 거죠. 아직 까지는 최선이지만, 결코 자연스러운 치료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조혈모세포이식이 최선의 치료가 아닌 시대가 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명의의 특강
급성골수성백혈병
정확한 분석과 위험군 평가,
치료의 첫걸음
⚊
급성골수성백혈병은 백혈병세포의 염색체 이상과 분자유전 변이가 다양하고, 환자 개개인이 가진 인적 요인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질병이라기보다는 매우 다양한 유형들로 구성된 질환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치료에 앞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글 정준원 교수(혈액내과)
골수에서 시작되는 진행 빠른 혈액암
급성 백혈병은 대표적인 혈액암으로, 백혈병 세포가 어떤 혈액 줄기세포에서 기원했는지에 따라 골수성과 림프모구성으로 구분합니다. 성인 환자는 대부분 급성골수성백혈병 (Acute myeloid leukemia, AML)'로 진단받지만, 유년기에는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이 주종을 이룹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은 골수와 혈액에서 백혈병 암세포가 계속 증가하고 정상적인 조혈 기능은 억제되는 특징을 보이며, 척추나 뇌 등 특정 장기에 백혈병 세포가 침투하기도 합니다. 조혈모세포 단계에서 백혈병 줄기세포 클론이 생기고 이후 급속도로 백혈병 세포가 늘어나 1012개 이상으로 증가했을 때 혈액 이상과 증상이 발생하는데, 이 과정이 매우 빠르므로 음성질환 중 유일하게 ‘급성’이라는 단어가 진단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은 하나의 질병이라기보다는 매우 다양하고 특징적인 유형(서브 타입)들로 구성된 질환군입니다. 백 혈병세포의 염색체 이상과 분자유전 변이가 다양하고, 환자 개개인이 가진 인적 요인도 차이가 크게 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질성으로 인해 환자의 임상 경과와 치료 반응, 사망률, 완치율이 제각기 달라집니다.
환자의 약 10%, 종자계 유전자 돌연변이 관찰
다른 암과 마찬가지로 급성골수성백혈병의 원인과 발병 기전은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에 다른 암으로 항암치료를 받았거나 직업적으로 유기용매에 오래 노출된 경우, 골수형성이상증후군과 같은 선행 골수 질환 등이 위험인자로 꼽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유전되는 병은 아니지만, 생식계 혹은 종자계 세포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 급성 골수성백혈병을 포함한 여러 종양 질환이 생길 수 있는 경향성이나 소인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유전된다고 해서 백혈병을 포함한 암성 질환이 반드시 발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브란스병원의 차세대염기서열분석(Next Generation Sequencing, NGS)에 따르면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약 10%에서 종자계 유전자 돌연변이가 관찰됩니다. 암 가계력 이 있는 경우, 가족이나 친척이 백혈병 관련 유전자 이상을 진단받으면 이 검사를 통해 전문적인 유전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상 혈액세포 감소에 따른 감염과 출혈, 빈혈
골수에서 백혈병 세포가 증가하면 정상 혈액세포의 생산이 크게 줄어들면서 호중구 감소에 의한 감염증, 혈소판 감소에 의한 출혈, 적혈구 감소에 의한 빈혈 증상 등이 발생합니다. 뇌와 척추에 백혈병 세포가 침투하면 위중한 신경학적 증세가 나타날 수 있고, 다른 장기 역시 백혈병 세포가 침투해 관련 증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보건기구의 진단 기준에 따라 혈액이나 골 수에서 백혈병 세포가 20% 이상 관찰될 때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단합니다. 혈액이나 골수에서 백혈병 세포가 관찰되지 않지만, 조직검사에서 다른 장기나 조직에 백혈병 세포의 침투가 확인되는 경우에도 진단할 수 있습니다. 더욱 정확한 위험도 분석과 치료 계획 수립, 예후 예측을 위해 유세포 검사, 염색체검사, 다양한 분자유전검사, 차세대염기서열 검사 등을 추가합니다.
위험군 평가에 따라 적절한 치료 계획 수립전성 대장암, 유전자검사와 유전상담 필수
조혈기관인 골수는 몸 전체에 걸쳐 있는 하나의 장기라고 할 수 있으므로 급성골수성백혈병은 고형암과 달리 병기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검사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되는 예후 군에 따라 치료 방침이 정해집니다.
또한, 고형암은 병기에 따라 치료 방침이 달라지므로 병이 더 진행되기 전에 치료를 서둘러야 하지만, 급성골수성백혈병은 환자의 나이와 기저질환, 백혈병 세포의 염색체와 분자유전 이상 등에 따른 정확한 분석이 더욱 중요하므로 적합한 치료를 결정하기 전까지 치료 시작이 지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절한 치료로 조혈 기능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면역 저하와 출혈 위험성이 지속하므로 치료를 너무 늦추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항암치료 시작 시기를 일률적으로 제시하기는 어렵고,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적절한 때에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험군 평가에는 치료 성적에 따라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저위험군, 중간위험군, 고위험군으로 분류한 유럽 백혈병 네트 워크(ELN) 체계가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각각의 위험군은 특징적인 염색체 이상과 분자유전 이상 소견을 보입니다. 위 험군 분류 체계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 성적과 임상적 예후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관해후치료 시행 여부 및 치료 방향 결정에 도움 됩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 치료는 크게 관해유도치료와 관해후치료로 진행된다. 일차적으로 항암치료를 통해 관해 상태에 도달하게 한 뒤, 장기 생존과 완치를 목적으로 공고항암화 학요법, 동종조혈모세포이식 등의 치료를 시행합니다. ‘완전관해’는 항암치료를 통해 백혈병 세포가 효과적으로 제거되어 골수 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된 상태를 의미하며, 골수 내 미숙 세포 5% 미만, 말초혈액 내 호중구 1천/㎣ 이상, 혈소판 10만/㎣ 이상 등의 수치로 정의합니다.
저위험군 환자들은 항암치료에 반응이 좋고 다른 위험군에 비해 재발률이 낮으며 장기 생존율이 높아서, 관해후치료로 동종조혈모세포이식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많은 환자가 속한 중간위험군과 고위험군에서는 관해에 도달하면 관해후치료로 동종조혈모세포이식을 시행합니다.
지난 50여 년간 고전적인 세포독성항암제가 관해유도를 위한 치료제로 사용해왔으며, 현재도 ‘7+3’ 요법으로 불리는 복합 항암 화학요법이 관해유도치료의 바탕을 이룹니다. 하지만 최근 표준 강도의 항암화학요법을 시행하기 어려운 고령 환자에게 경구용 신약(Bcl-2 억제제)을 포함한 저강도 항암 화학요법이 도입되었고, 저위험군의 치료 성적을 더 높이기 위한 항 CD33억체제,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는 환자의 치료를 위한 경구용 표적 치료제(FLT 3 억제제) 등이 추가되었습니다. 아울러 기존의 ‘7+3’ 요법으로 좋은 관해유도율을 기대하지 못했던 치료 관련 백혈병이나 2차성 백혈병에서 기존의 2가지 항암제를 하나의 항암제로 재구성한 신약이 도입되는 등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표준 강도의 관해유도치료 후 관해에 도달했으나 동종조혈모세포이식을 시행하기 어려운 환자에게 경구용 저메틸화제제를 유지요법으로 투여해 치료 성적이 향상된 사례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정준원 교수
혈액내과
⚊
월간 <세브란스병원> 2023년 07월호